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세 단계로 역사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뀌고 변하는 주기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단계들을 이렇게 불렀다. 정립, 반정립, 종합. 이런 단계들을 세계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생명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서 정치, 경제, 사회, 군사, 사상 각각의 분야에서 드러난다. 당연히 각각의 분야는 실제로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 우주의 형편에 대한 가치나 중요성을 지성이 일정한 결론에 도달하여 이미 확정되어 인정한 설로 간추리고 결정짓는다. 그런 상황에 대해 약간은 파편적인 진리를 분명히 이러한 정설은 나타내고 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제일 처음 내놓은 정설에 대해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일이 발생함으로 이런저런 부족한 처음의 정설에 대해 또는 그 파편적인 이해와 긍정적이지 않은 지적을 모아 이성이 실재의 조금 더 큰 영역을 더 옳고 바르게 이해하여 알게 된다. 한데 모아 합해진 것 안에 모두 보호하고 간수되어 정립, 반정립의 파편적 진리들은 조금 더 전반적인 입장으로 결합하여 하나가 된다. 그리고 헤겔은 이런 정, 반, 합의 일정한 간격을 둔 운동은 멈춤 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정에는 끝이 없다. 쓸만한 것을 한데 모아 합한 모든 것은 새롭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분석하여 따짐을 위해 바로 세우는 것이 된다. 또한 이처럼 분석하여 따지는 것은 한데 모아 합해진 것이 옳고 바른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새로운 계기를 보여줌과 함께 훨씬 더 큰 영역에 걸쳐 겪은 일들에 대해 조금 더 모자람 없이 넉넉한 이해로 나아가게 해 주는 것이다. 세계의 역사는 변증법적 과정의 하나이며 헤겔은 사상에 있어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운동을 역사의 변증법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헤겔이 세계 역사의 사실이나 관점을 나타내며 한 말이다. 그는 변증법적 과정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서 우주론적인 부분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것은 너무 이해가 힘들어서 철학자들도 극소수의 사람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그가 인류 역사가 앞으로 향하여 나가는데 자신의 변증법적 공식을 알맞게 이용하거나 맞추어 썼을 때, 이러한 공식은 더 쉽게 이해되고, 또한 다른 것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헤겔은 대단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고 더 나아가 과거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시대까지, 유럽의 정치와 사회의 역사에서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알맞은 구체적 사례들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플라톤의 관념론 이란 것은 반정립으로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을 생기게 한 하나의 정립으로 헤겔은 외부에 정식으로 표명했다. 하지만 이 두 서로 반대되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에서 알맞게 조절하여 서로 잘 어울리게 되었다. 쾌락에 관해 관심이 없는 스토아학파의 반대 변론을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초래했다. 그리고 옳은 부분도 그릇된 부분도 가지고 있었던 두 학설 모두 조금 더 치우침 없이 고른 상태를 유지했던 기독교의 윤리학에 의해 잘못된 점을 극복해 냈다. 헤겔은 충돌과 충돌을 가지고 만든 새로운 유형의 사회 질서를 정립하는 정치가다운 설립을 설명하는데 자신의 변증법적 방식을 매우 재치 있고 약삭빠르게 활용했다. 인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부르봉 왕가는 특권층이 자신들의 여러 권리를 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는 것에 관해 주장했는데, 이것은 사람들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요청하는 자코뱅당의 혁명을 지향하는 주장에 바로 맺어져 인연이 되었고 이 두 입장의 파편적 진리는 하나로 모아져 조금 더 건강하고 온전하며 실천으로 발전해 나갔다. 국민들을 위해 여러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헤겔은 몇 년 동안 논리학의 체계를 갖추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그는 인식과 실재에 대해 새 논리학 하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변해가는 사건들과 더 높은 상태로 나아가는 사물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논리학을 바랐다. 종종 우리는 사건들의 과정이나 원리에 관해 얘기하며 헤겔은 이처럼 우리가 하는 것은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형식 논리학이라는 것은 사건들의 논리학이 아니며, 다시 말해서 헤겔이 말하는 논리학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가 큰 소리로 외치는 논리학이란 절대정신이 점점 나타나거나 드러남에 있어 사상의 규칙적 움직임을 긍정한다. 이 참신한 논리학은 우리 사고를 모방하여 만든 것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이미 그것은 우리들의 한계가 있는 정신들에서 다른 곳으로 가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자 노력하고 있다. 무조건적 경험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궁리하는 법칙에 관해 깊이 있게 조사하고 따져보는 일을 신학이라고 논리학을 규정하는 것은 그럴듯한 일이다. 하지만 생각하고 궁리하는 이런 법칙에 관해서 보통과 다른 인간적인 것으로 우리는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것들은 일반적인 문화의 발전 또는 절대적 사고의 법칙이다. 이러한 사고는, 논리학에 의해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규범이 일임되는, 무엇보다도 점점 발달하여 가는 세계의 역동적인 발전이고 오로지 부수적인 것으로 또한 결과적으로만 가장 좋고 훌륭한 통찰의 찰나에 있어서 어질고 총명한 사람들의 사고이다. 인간 사고에 있어 사고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범들이 반드시 따르고 지켜야 할 가치 판단이 기준이 되는 원리가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들이 우선 우주의 시간적 나아감에 실제적인 얼개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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