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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철학 : 아리스토텔레스

by funfearless 2024. 7. 26.
 

윤리학은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천착하는 학문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며 이것은 본래 타고난 것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타인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떨어져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학은 어쩔 수 없이 정치학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면 말이다. 만약 신이라면 주변과 단절된 생활을 하더라도 스스로 목적한 바를 이루어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사회생활 속에서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윤리설에서 플라톤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연히 인간이 달성할 때까지 좇아 구해야 하는 것으로 도덕적 목적을 표현하는데 에우다이모니아라는 말을 썼다. 따라서 그의 윤리학을 에우다이모니즘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완전한 행복을 뜻한다. 종종 행복과 쾌락을 현대 영어에서는 서로 구별하지 않고 한데 섞어서 쓰는 경우가 있지만 에우다이모니아는 쾌락과 같은 뜻이 아니다. 쾌락은 좋음과 나쁨이 모두 있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쾌락은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과 불행 각각의 일부일 수도 있다. 물론 좋은 것은 선한 사람이 느끼는 쾌락만을 말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의 쾌락은 나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선한 사람의 쾌락을 우리는 칭송해도 좋다. 하지만 매우 강하고 또한 많은 쾌락을 어떤 사람이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그 사람이 선하다고 단정을 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 대한 이치에 맞고 바른 평가는 그가 누리고 있는 쾌락의 양에 따라서 측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인간성에 대해 말한 덕목과 분석을 조금 다르게 바꾸어 새롭게 고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합리한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 불합리한 부분은 다시 이성의 지배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로 구분했다. 그리고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각각은 그에 맞은 탁월성이 존재한다. 뜻밖에 얻은 행복이나 행운의 결과로써 갖게 된 육체적, 정신적 상태의 선천적 경향으로 불합리한 부분에 대응하는 자연적 탁월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덕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이성으로 조정할 수 있는 운명도 있지만 극복할 수 없는 더 많은 요소의 지배를 우리는 받고 있으며 이것들은 타고난 행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불합리한 부분 중 이성에 지배받는 것으로는 도덕적 탁월성이 있다. 이것은 바른 습관을 만들어지며, 플라톤이 말했던 절제와도 비슷하다. 마지막으로 이성적 부분에 대해 대응하는 것으로는 지적인 덕이 있다. 이것은 가르침 그리고 지속적인 성찰에 의해 얻어진다. 그리고 결국은 최고의 지혜를 가지고 오는 궁극적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논리학을 다른 사람이 단순히 옳다고 인정하도록 지식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나타내거나 정리하여 바로잡고 가지런하게 하는 방법으로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논리학이 그런 하나의 방법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보다 더 많은 맡겨진 임무가 있다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는 논리학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진리를 찾고 우리의 인식이나 이해를 넓혀나가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논리학을 형식적인 것으로만 여긴다면 어떤 생각이 존재와 나란히 나아가는 것을 잊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하지만 제일 본바탕이 되는 과학의 원리들 그 자체는 밝혀낼 수 없다. 그것은 갖추어지거나 제시된 주제에 대해 깊고 자세하게 알게 된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도 당연히 존재해야 하는, 궁리하여 알게 되는 진리인 것이라 여겼다. 이러한 진리들에 대해 신중하게 관찰하면, 그 특정한 과학에서 사용하는 실체들 안에서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발견될 기초적 형식을 가려줄 따름이다. 옳고 그름을 이유로 들어 밝혀냄이 시작되기 전에 얻어진 논증할 수 없는 근본이 되는 진리가 없다고 하면, 논증이라는 것은 절대 출발점을 갖지 못할 것이다. 또한 과학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이 결코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옳고 그름을 밝힐 수 없는 근본이 되는 진리들은 그것들을 기본적 원리로 여기고 있는 과학이 관여하여서 참여하는 실체들과 직접적으로 만남으로써 확실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피며 분석하는 중이거나 그 이후만 아니라 그 이전에도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실제의 세계가 없다고 한다면,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의의도 없게 되고 명제들 또한 이치에 어긋남이 조금도 없는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서양 문화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데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근세 경험론자들의 관념은 모두 그보다 앞에 있던 인상들을 베낀 것이라는 주장에서도 알 수 있고 또한 중세의 유명론자의 느낄 수 있는 것들 안에 없었던 것은 지성 안에도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는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가장 근본이 되는 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실체로 물질을 보고 그 나머지 것들은 물질의 변화 과정의 원인과 결과에 따라 부수적으로 생기는 물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이런저런 형태의 유물론적 견해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 이외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의해 튼튼하게 된 인본주의적 관습 안에서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아퀴나스는 윤리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이 마치 같은 선상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