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생각해 나 자신의 의견으로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강력하게 상호 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는 강력하게 상호작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음과 몸에서도 그러하다고 생각했으며, 몸이 관념을 만들어낼 수도 또한 관념이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고 여겼다. 라이프니츠의 상호작용에 대한 눈에 띄는 두 가지 부인은 결과를 가져왔다. 먼저 오로지 정신적 실체만이 있다는 견해이다. 다시 말해서 소위 형이상학적 유심론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는 이지점에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철학에 대해 비판을 가했는데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실체가 가진 본질이라고 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라이프니츠는 나눌 수 없음이 모든 실체가 가지고 있는 당연한 특징이라고 보았다. 즉 이런 불가분성이야 말로 실체로서의 조건이며 권리라는 이야기이다. 진실하고 올바른 실체의 성격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직관으로 알 수 있는 것이며 또한 마음과 관련된 활동의 독자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중심인 것이다. 실체라 불리는 것을 중에는 단순한 것들이 더 많으며,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감에 있어 정도가 낮은 것들도 많다. 라이프니츠도 흔히 모든 실체가 마음과 같은 것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실체라는 것은 점과 다르지 않고 물리학자들은 그것을 힘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형이상학자들은 그렇게 실체를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다른 실체로부터 다가오는 접근과 참견을 실체는 쳐서 물러가게 하고 그 자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본래의 자세를 유지하는 물리적이지 않은 실재이다. 라이프니츠의 생각에 가장 높은 정신은 신이며, 또한 그 아래에 이성적인 마음, 욕망과 감각이 함께하는 동물 같은 의식의 부분과 식물의 혼들, 그리고 우리가 보기에 정신적이거나 내적인 성격은 전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무생물의 혼들이 차례로 있다. 이처럼 라이프니츠는 우주를 헤아릴 수 없는 정신적 실체로 여겼고 또한 계층이 짜임새 있게 조직되어 존재한다고 보았다. 제일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정신은 예를 들어 우리가 기절했을 때와 같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이다. 그리고 우리가 혼수상태로부터 깨어날 때,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가 자신의 의식을 생생하게 회복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 회복이 차례에 따라 진행되는 과정이고 회복되기 전에 매우 어렴풋한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이러한 어렴풋한 의식 상태에 언제나 있는 것이 제일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정신들이다. 하지만 생명이 없는 물질적 대상은 우주 쪽에는 없다. 우주는 그 전부가 정신적인 그런 대상이라고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아주 재치 있게 약삭빠르고 묘한 비유를 들어 어렴풋한 의식에 대한 자신의 학설이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바닷가에 갔을 때, 우리는 시끄럽고 떠들썩한 파도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한 방울 한 방울의 바닷물 소리는 들을 방법이 없다. 이렇게 바다가 수많은 물방울이 모여 있는 것처럼 우리가 듣게 되는 시끄러운 파도 소리는 수많은 어렴풋한 소리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어렴풋한 소리가 없었더라면 그 큰 파도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졌겠는가. 이렇듯 그 어렴풋한 의식의 바로 제일 아래 단계의 실체들이 갖고 있는 의식이다. 라이프니츠는 정신들은 그 이외의 다른 정신들에는 다 물체처럼 뵌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물체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의 본질도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 아닌 것 이거나 또 정신적인 실제의 물체가 다른 실제 물체의 의식 안에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나지는 양식이다. 이 세계에는 물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정신들은 행동하는데 그 이유는 정신의 뒤를 이어 따르는 상태는 물체로부터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내는 영향을 받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체들도 이 세계에는 정신이 없는 것처럼 움직인다. 그 이유는 정신이 그 이외의 정신에 인식될 때에는 꼭 연장이라는 표현의 형식을 빌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 대해 라이프니츠의 입장은 이러했다. 똑같은 실체를 우리는 생각과 연장 어떤 사물의 성질에 근거하더라도 모자람 없이 넉넉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견해에 어떤 힘의 도움을 받았음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하지만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스피노자와 달랐다. 그는 유일한 실제는 정신이라고 생각했고, 물체는 구체적 사물로 나타내는 가상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라이프니츠는 정신이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의식 상태일 뿐이라고 말한 데카르트의 인식이나 판단의 기준이 주관에 있다고 보는, 즉 주관주의를 방편으로 사용했다. 논리학의 변하여 온 기록을 보면 라이프니츠는 두 가지의 중요한 원리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이것은 그의 형이상학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먼저 모순율에 대해 말해보자. 이치상 어긋나서 서로 맞지 않는, 즉 모순되는 명제는 참이 아니 다라는 것과 이런 거짓된 명제에 이치상 맞지 않는, 서로 반대되는 명제는 참이라는 것을 모순율은 보여준다. 모순율을 잘 이용함으로써 이성의 참된 이치를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이성의 진리라는 것은 맹세코 당위성을 가진 진리이며, 라이프니츠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이성의 진리는 사실 분석적 명제이므로 생득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다음으로 충족 이유율이 있다. 이것은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은 그 존재에 대한 까닭이나 근거가 있다. 또한 어떤 명제도 까닭이나 근본이 없이는 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충족 이유율을 잘 이용함으로써 사실의 진리를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실의 진리는 우리에게는 우연적 진리이며, 경험에 의지하는 후천적인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제일 새로운 생각이라 여겨지는 점은 사실의 진리나 이성의 진리를 구분하면서 이 구분이 일정한 한도나 한계가 있는 정신에만 알맞게 이용하거나 맞추어 쓸 수 있다고 강력하게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그것처럼 말이다. 한계가 없는 정신인 신에게는 이 세상이 모든 진리는 선천적으로 이해하여 알게 되며 이성의 진리이다. 신이라면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진리를 인간인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해져 있는 시각에 죽는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신에게는 그 사람의 그 시각에 죽는다는 개념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다신 말하자면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관점에서 보면 진리라는 것은 모두 논리적으로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요소나 성질, 즉 필연성을 갖고 있다. 세계에 대해 이러한 의견의 밑바탕에는 우리가 아는 것이 많을수록 실제로 해 보거나 겪어 볼 필요성이 줄어든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지식의 이상은 모자람이나 이 흠이 없이 합리론적이며, 물론 그가 사실의 진리는 이성으로만 가질 수를 없다는 사실을 긍정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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