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는 경험론자였다. 왜냐하면 관념마다 정도나 기준에 꼭 맞는지 아닌지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관념이 보통과는 특별하게 다른 세부적인 사실들을 이해하거나 판단할 경우에 말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전통적인 경험론자들과 경험관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는 전통적 태도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취했고, 스스로의 경험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비판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한 관념들이나 고립되어 있는, 마음으로 느껴지는 요소들을 시작되는 기점으로 여기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인간이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의 한계를 분명하게 정하려 하는 자세를 어긋난 것으로 보았다. 화이트헤드의 경험관은 매우 새로운 몇몇 지점을 가지고 있고 더 나아가 실제적인 현실 세계에 관해서 아주 다양한 지식에 이를 수 있게 한다. 전통적 경험론자들이 생각한 것보다 말이다. 첫 번째로는 밖으로부터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기관이 우리가 사실이 혼란스럽게 얽혀있다는 것을 이해하여 알게 해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벽의 색이나 어떤 색을 가지고 있는 작은 점이 번져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바로 그것만 오래 낸 것처럼 경험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저 벽 위의 색으로 경험한다. 이처럼 화이트헤드는 구별되는 것은 구별할 수 있는 것과 함께 영향을 미치는 자연적 조건이나 상태의 전체적 구조 안에서 제시되거나 갖추어진다고 말했다. 경험에 있어서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바뀌게 되는 원인이나 기회는 하나의 크기와 방향을 가지는 양에 서로 견줄 수 있다. 그 이유는 원래 그 본래의 바탕을 가지고 있는 형식 이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그 자체를 넘어서 지나는 데를 향하며, 그로 인해서 그것이 바깥 모양새도 드러나는 하나의 범위가 아주 넓은 구조를 지니는 성질이나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밖으로부터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기관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양식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화이트헤드는 생각했다. 인간의 경험은 때때로 논리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못하고 더 나아가 항상 부분에만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세부적인 현실의 본질에 깊숙이 스며들어 가고 있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분명하게 감각적인 것도 아니고 인식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양식을 갖고 있다. 화이트 헤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경험 양식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구체화하여 나타나는 성질과 원인과 결과의 효력 깨달음이다. 이 두요소는 인간의 경험에서 같이 나타나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전자는 매우 고급한 것이기는 하나 세계에 대한 지식의 근원으로써 기본적인 것은 아니며, 다른 양식들과 떨어뜨려 보면 아주 약한 것이다. 이에 비해 후자의 양식은 어림짐작으로 헤아려 알아낼 수 없고 어렴풋하며 더 나아가 하나의 힘겨운 부담을 주거나 참게 어렵게 강요하는 힘이고 본바탕과 관련된 경험이다.
사람의 경험은 나뉘어 떨어진 존재 영역도, 개인적인 존재 영역도 아니라고 존 듀이는 주장한다. 그런 것들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나아감의 한 부분이다. 자연이란 다시 말해 경험 속에서 보이게 된다. 이러한 시각, 자연과 경험의 관련성에 대한, 은 헤겔의 정통 이념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듀이는 이 말을 믿게 되었다. 또한 헤겔로부터 가치 있는 사상은 아무리 낮게 평가하여도 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듀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헤겔처럼 그도 유일한 한 가지 가능한 인식론은 사회의 모든 얼개 속에서 바로 그 본래의 바탕을 만들어 내는 사상을 다루는 것이다. 문화의 한 측면이 바로 사상이다. 어떤 한 사람이 매우 뛰어난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어서 그 재능으로 그 사람이 지도자로 탁월하다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정신이라는 것은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생활 기능을 가지게 된 조직체가 물리적 환경과 사회적 상황과 함께 서로 관계를 맺는 모든 방식의 과정이다. 매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과 매한가지로 천재도 어느 문화의 역사적 맥락에서 어느 특정한 때에 특정한 사회에서 출생한 것이고 또 문화적 배경 안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람은 이전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습관에 대해서 복종할 필요가 없다. 그는 문화적 환경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관계하여서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사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그것은 전체의 역사적 시국 안에서 앞을 향하여 나가고 있다. 머리 또는 신경과 관련되어 있는 부분의 조직에서가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그저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짧은 한때에 중심이 될 뿐이다. 사상은 다름을 낳는다. 사상이 역사적 맥락에 관계하여 참여하되 보람이나 효과가 있도록, 다시 말해 어떤 열매를 가져오도록 관여하며 또한 사건들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만드는데 강력한 요소 중에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듀이는 로크를 비판했다. 사물의 진실하고 올바른 본질이라는 것이 생각과 궁리가 시작되기 전에 있던 그대로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이다. 헤겔이 옳았는데 사물들이 생겨나는 것은 사상에 의해 결정되고 더불어 그것의 진실하고 올바른 본질도 또한 사상에 의해 결정된다고 헤겔은 생각했다. 듀이는 순서대로 회의, 탐구, 답의 경험이 사고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헤겔의 역사에 대한 견해를 약간 가다듬은 것이다. 듀이의 생각에는 헤겔이 지나치게 굳고 단단하며 일정한 형식이나 틀에 생각을 맞추려 하는 것처럼 보였고 따라서 헤겔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듀이는 이미 확고하게 만들어진 규칙적인 형식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사고는 아니라는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듀이는 헤겔에게 한 가지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고 항상 이것을 깊이 새겨 두었는데 사상의 기능에 관한 것이었다. 사상이란 사상보다 먼저 존재하는 움직이거나 변경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드러내거나 알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현실을 만들어내는 데 참가하여 관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듀이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지식을 변화, 문화 등과 같은 동일한 성질을 가진 부류나 범위를 가지고 생각할 때 그 고유한 성질들을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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