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신학을 본바탕부터 다른 것이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생각했다. 철학은 관찰하면서 알게 된 주제들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신학은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신이 깨우쳐 알게 하는 교리들로부터 시작한다. 철학자, 신학자 모두 이성을 이용하며 각각 그들 자신이 가진 지식을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한 것으로 그리고 또한 논리의 이치들에 적합하게 더 낫고 좋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신학 대전에서 여러 철학적 문제를 건드렸고, 그리고 또한 철학의 학파 중 하나인 아베로에스의 관점을 조리 있게 공격하여 말한 대이교도 대전에는 제법 여러 신학이 들어가 있다. 이처럼 아퀴나스는 철학과 신학을 서로 관계를 맺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 이성의 여러 기능 중 하나는 한가지 짜임새 있게 조직된 통일된 전체 안에서 우리의 지식을 모두 갈무리하여 서로서로 일정한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꼭 해야 할 일이나 임무는 그 본연의 진리가 하나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전체이기에 해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과 신학이 똑같은 문제를 처리하고 또한 같은 명제들을 옳다고 인정하더라도 철학과 신학의 인상은 명백하게 다르며, 어떠한 경우라도 서로서로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다. 철학과 신학은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명제들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두 가지 모두 매우 중요한 점에서 각각 다른 것들을 다룬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철학과 신학 모두 인식을 달성할 때까지 좇아 구하여가는 차례나 방법에 있다. 철학은 몸소 겪은 것으로 이성을 사람이 경험한 사실로부터 나오게 할 수 있는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신앙을 깨우쳐 알게 하는 교리들의 가치와 의의를 전부 드러내고 밝혀내는 데 신학은 이성을 사용한다. 아퀴나스의 존재를 여러 단계로 구분 짓는 것에 대한 이치를 논리적으로 일반화한 체계는 하나님을 말하는 데 있어서 그 최고에 대한 상태나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요소들이 이 논의에 각각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아퀴나스는 다섯 가지의 진위를 증거로 들어서 밝혔다. 우주론적인 논증이나 언급된 처음의 세 가지를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세계 또는 우주에 대해 조금은 몸소 겪게 된 특징들을 근거로써 앞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근거를 두고 기대어 의지하고 있으며 또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그것을 좇아가고 있다. 네 번째는 조금 더 플라톤적이며 다섯번째는 이후에 목적론적 논증이나 이름이 붙여졌다. 그 이유는 세계 속에 그것이 명백하게 계획이 있다는데 근본을 두고 증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로 하나님의 진위 증거를 들어서 밝힌, 아퀴나스가 생각하는 최초의 원인인 하나님은 그러나 존재론적인 최초이다. 하나님이 오랜 과거에 존재했고 행하는 것과 같은 시간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은 계속 이어지는 전체가 의지하고 있는 그 바탕 밖에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부동이면서 동하게 하는 존재이며 그 밖은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다. 아퀴나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홀로 필연적인 존재이며, 다른 것은 전부 우연적인 것이다.
아퀴나스는 행복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의 명령 아래에서 인간성의 가장 좋은 이런저런 가능성을 이루어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또한 더할 수 없는 행복은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자연적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것으로 성자들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았다. 그는 이런 도덕 철학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두 종류의 덕목을 가리켰다. 다른 측면에서는 절제, 용기, 정의, 지혜, 플라톤이 말한 네 가지의 자연적 덕을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세 가지의 더 믿음, 소망, 사랑이 있다. 전자는 자연적 덕으로 후자는 초자연적 덕으로 불린다. 아퀴나스는 도덕적인 것, 지적인 것으로 자연적 덕을 구분했다. 이 두 가지 덕은 각각 다르며 아퀴나스는 이 부분에서 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였다. 이 두 가지 덕은 이성도 무엇을 즐기고 좋아하는지가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 경험에 도움을 받지 않고 순수한 이성에 의하여 인식하는 통찰은 제일 탁월한 인간의 일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통찰을 추구하는 이성은 자연적으로 다 이루어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데 이르며 지혜를 얻게 된다. 또한 이런 지혜는 절제, 용기, 정의, 지혜의 4주덕 중에 제일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성은 또 다른 세 주덕으로 지향하여 가게 하는데도 꼭 필요하다. 깊이 있는 생각을 이성은 하게 되며, 도덕적 덕들을 이루어냄에 있어서도 하나의 조건이 된다. 4주 덕은 이루어 내어 얻게 되면 사람은 자연적 행복을 차지하게 되며 자연적 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인산은 행복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고 자신의 이성을 움직여 행복해지는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다. 하지만 죄를 지은 것으로 다루어지는 인간의 이런저런 능력만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무거운 원죄의 짐을 떠안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자연적 행복조차도 성취하기가 어렵다.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아무런 죄가 없었을 때의 그 인간성이 행복에서 완성된 인간성이다. 이것도 도덕적 정신적으로 타락한 인간성이 아니며, 타락한 인간성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본래의 바람직한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주덕들을 얼마쯤 실제로 행하는데 이치를 논리적으로 일반화하는 데 있어 본이 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신의 은총을 받은 자만이 오로지 행복하게 될 어떤 성질을 갖고 있다.
카테고리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