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주의는 참되고 올바른 선을 쾌락이요, 그 이외의 것들은 만약 조금이라도 가치가 있다면 쾌락을 계산해 냄에 있어서 그 쓸모 때문이라는 주의이다. 쾌락주의 윤리설을 처음으로 편들고 나온 사상은 에피쿠로스학파였고 이 학설은 달리 생각할 것도 없이 좌절 의식에 근원을 두고 있는 쾌락주의다. 에피쿠로스는 일반적으로 다른 특색이 있는 생활을 하였으며, 몸이 쇠약하였고 어린 시절에 행복하지 않았다. 그는 이에 따라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에피쿠로스는 세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치 세상이 모든 사람을 파괴해 버릴 것이라고 확신에 찬 사람처럼 에피쿠로스는 생각했고 그러한 세상과 가능한 한 오래 관계를 끊기 위해 자신의 정원 주위에 단단하고 높은 장벽을 쌓는 것을 지혜로 여겼다. 더 나아가 완전히 세상과 관계를 끊고 조용하고 평안함 안에서만 일정한 정도의 즐거움이나마 우리를 잠깐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신조는 이런 것이라 여겨졌다. 내일이면 당신은 살아있지 않을 것이니, 먹고 마시고 즐겨라. 더 나아가 이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의 전통이라고까지 여겨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도무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큰 왜곡이며, 에피쿠로스는 오히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과 떨어져 지내기 위해 절제를 강조한 사람으로 제자들에게는 금욕주의적이라 할 정도로 진심으로 타일렀다. 에피쿠로스는 세상일에 관계하여서 참여하지 말고 또한 육체적 쾌락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사람들에게 강조했다. 그는 외부의 변화나 내면의 감정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생활이 사람에게 있어 좋은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에피쿠로스에게 행복은 성을 욕망으로 나눈 것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성취를 늘려감으로써 행복을 점점 증가시킬 수 있다고 장려하겠지만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행복을 늘리는 방법은 욕망을 줄임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생각할 때, 성취를 계속해 나간다는 것은 적대적인 이런 세상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졌고 따라서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씩 비워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에피쿠로스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슬픔이나 서러움으로 인해 현명한 사람은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누르기 어려운 감정에 절대로 휘둘리지 않는다. 우주의 원리와 법칙을 넘어서는 격렬한 성격은 어질고 슬기로워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가꿔야 할 마음의 평안함을 깨뜨리고 무너뜨릴 뿐이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키레네 학파에서부터 발전해 나가던 시기에 퀴니코스 학파는 스토아학파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여러모로 대조를 이루는 사상이지만 둘 다 인간은 세상의 보편적 질서나 일반적인 풍속의 행복관에 의해서는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는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다는 굳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다만 이러한 믿음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표명한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세상의 악과 맞서 싸울 것을 권하고 장려했다. 설령 싸우다가 망하여 없어지더라도 말이다. 또한 의무를 강조했는데 이런 말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당신의 의무를 행하라. 그들은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의무를 위해 변하지 않는 충직과 성실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특별한 권리라 생각했다. 또한 스토아학파는 소극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 이렇게 두 가지의 근본적 덕을 얘기했는데, 감동이 없는 것, 즉 고통에 두려움과 쾌락에 대해 냉담한, 무관심한 것이 바로 소극적인 덕인 것이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덕이란 무엇인가? 이성적이고 침착하며 사리에 밝은 것에 대한 충실이다. 더 나아가 모든 종류의 사건을 처리하여 나가는 우주의 원리 또는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쪽에 대한 충실을 말한다. 어진 사람이라면 사적 희망이나 개인의 야망을 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스토아학파는 우주의 목표는 그 사람에게 맡긴 임무를 이루려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스토아학파의 생각은 어진 사람이란 오직 이성적인 사람을 일컫는다. 또한 모든 종류의 적극적 감정을 끊어 버리고 오직 이성적으로 곰곰이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반대였는데, 그들은 어진 사람이란 적극적 감정이나 여러 가지 욕구를 이성으로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스토아학파에 감정은 사리에 맞고 바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공평하고 올바른 판단 활동을 가로막는 도덕적 병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 대해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이나 동정심조차도 없어야 할 것으로 여겼고 만약 자기를 망설임이나 머뭇거림 없이 희생하거나 또는 자신의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 없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의무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으로 여겼다. 스토아학파에 있어 지혜와 덕이 뛰어나 길이 우러러 본받을 만한 사람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침착하며 사리에 밝고 조용하고 잠잠한 상태를 즐겁게 누리는 사람일 것이다. 또한 우주의 목적에 대해 그대로 고스란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해 나감에 있어서 자신의 올바르고 마땅한 임무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스토아학파가 저술한 책들에는 이러한 생활 원칙이 언제나 적혀있다. 자연에 따라 살아라. 물론 여기에서 자연은 당연하게도 물질적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안에 한결같이 있는 우주의 목적, 즉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 우리가 섭리나 신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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