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는 머뭇거리며 망설이면서도 일정한 시간보다 이르게 결정론적 철학을 옳다고 믿고 받들었다. 그러다 칸트의 많은 책들을 읽고 결정론에서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으로 신앙의 이론을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선택했다. 피히테는 결국 철학이라는 것은 전부 의지가 맡아 관리하는 것이고, 또 사람들의 이런저런 도덕적인 다짐이나 마음에 그 밑바탕을 두고 있다고 강력하게 이야기했다. 피히테는 그의 저서 인간의 사명에서 세 가지의 철학적 견해에 대해 말했는데, 이 세 가지 견해는 사람들이 도덕적 신앙의 기본이 되는 것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각각 다른 견해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를 가지런하고 질서 있게 드러낼 수 있으며 또한 이런 지지자들에게는 자신의 견해를 경험이 증명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어떤 철학을 택하느냐는 개개인의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바깥세계로부터 자신에게 닥쳐오는 많은 세력에 무릎 꿇는 사람은 자신이 이 세계의 원리나 구조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게 된다. 알아서 깨닫는 경험과 감각기관과 그 지각 작용의 사실이나 원리에만 집중을 기울이는 사람은 자신의 사람으로서의 품격과 주위 세계가 전부 해결되어 없어짐으로 해서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려보는 것처럼 되고 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들을 위해 움직이려고 마음먹고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주인이 될 뿐만 아니라 세계가 그 사람의 여러 가지 도덕적 목표를 위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피히테의 인간의 사명은 세 권으로 되어있으며 각각 세 가지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세 철학을 말함에 있어 피히테는 1인칭 단수로 서술했다. 먼저 첫 번째 책에서 그는 메커니즘의 견해를 보여준다. 내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집중해서 볼 때 거기에서 개별적 특성이 없이 모두 엇비슷한 경험의 규칙성을 보게 된다. 앞서거나 앞에 있던 것들에 의해 모든 것은 결정되고, 또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전체 안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대상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나는 이 전체의 일부분이며, 매우 엄한 필연성에 육체 및 사고, 행동 모두 매여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내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나인 것은 자연의 전체 구조안에서 또 현상으로 나타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미래에는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은 나를 만드는 많은 세력에 달려있고, 또한 우리가 자유롭다고 느끼는 것도 내 안에서 필연성에 의해 일어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자연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결론짓게 되며, 이런 이론적 마무리에 대해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진심으로 자유롭기를 바라고 소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결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두 번째 책에서 피히테는 지각주의 견해를 보여준다. 만약 내가 모든 지각에 대해 섬세하게 주의를 집중한다면 나는 나의 의식적 상태만 지각할 뿐 그 이외의 다른 것에는 그렇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이나 실체, 영원히 계속되는 세계도 지각하지 않고 나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지각할 수 없으며 단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관념들 감각들의 헛되고 보잘것없는 연속만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사물, 자아 같은 개념들은 전부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려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내 앞에 존재하는 것에 집중하는 한 나는 주관에 의해 규정되고 제약받는 것으로부터 어떤 벗어날 방법이 없다. 마지막 책에서 피히테는 주의주의라는 그가 주장하기에는 이른 견해를 보여준다. 나는 결정론으로 이끄는 나 자신 안에 존재하는 지능보다도, 지각주의로 이끄는 감각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무언가를 발견하는데 그것은 바로 행동하려고 하는 충동이다. 지능과 감각의 뒤편에는 의지가 존재하고 인식과 지각의 뒤편에는 행동하려는 굳은 마음이 있으며 그리고 근본적으로 나의 의지라는 것은 도덕적 의지이다. 모든 현실과 경험한 모든 것의 뿌리는 양심이다. 나는 굳세고 위엄 있는 행위에 필요한 방법들을 갖기 위해 질서가 있는 하나의 세계를 갖고자 한다. 모든 움직이는 행위에서 내 자아는 짝꿍으로 나 밖 하나의 자아가 있어야 한다. 나는 나의 정신적 성장의 많은 요건을 재료로 해서 겨루어 이기는, 목적한 바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 내 길을 닦아 나가는 데 사용할 수 있다. 우주가 매우 엄하고 모질다 하더라도 또한 원인과 결과라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더라고 결국에는 나가 투사하는 전쟁터일 뿐이다. 나 자신으로부터 말이다. 내가 이처럼 투사하는 이유는 내가 도덕적으로 생활하는 데 있어 변화나 발전을 힘이 있고 씩씩하며 저속하지 않은 것이 되게 하며, 또한 힘써 간절히 바라며 구하는 도덕적 목표에 적합한 가치가 있는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피히테는 현실이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의 재료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는 그 기원을 칸트의 정언 명령에 두고 있다. 충동으로 이쪽저쪽으로 흔들리는 것은 매우 게으른 태도이다. 양심이란 힘이 있고 씩씩함을 필요로 하는 싸움이다. 하지만 피히테는 칸트와는 다르게 정언 명령 규칙의 보편타당성에 대한 필요가 아니라 개인의 발전에 대한 필요를 이야기했다. 따라서 정언 명령은 우리 자아의 모든 재주와 기질을 성장시키고 정신적으로 자유로움을 향해 발전하도록 살아갈 것을 명령한다. 그 결과 개인의 역량을 향상하게 하는 다양한 조건 아래에서 거스를 수 없는 법칙을 세계에 대해 영향을 미치기 위해 만들라고 명령한다. 세계는 어떤 실재적 특성도 그 자체로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자유로운 사람의 임무 혹은 명령의 터전이며 또는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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