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연구할 때 참고가 되는 서적이나 문서 안에서 서로 이리저리 관련이 되어있고, 그들을 역사적 사실 측면에서 서로 나뉘어 떨어지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플라톤이 남긴 대화편의 문서를 살펴보면, 소크라테스는 몇몇 편을 빼고는 작품 전부에서 주동적인 위치에서 대화를 이끄는 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직접 말한 것은 어느 것이고, 플라톤이 덧붙인 것은 어디까지인지 현재에서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 이 문제의 가장 그렇다고 여겨질 만한 가정은 대화편의 초기 내용의 큰 골자나 줄거리는 소크라테스의 것처럼 보이고, 대화편 후기의 내용은 플라톤 자신의 높은 수준에 다다른 철학을 드러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성찰에 있어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나가기 위해 따르는 활동 방침은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플라톤 또한 매우 뛰어난 철학자였으며, 이어받은 철학의 범위 안에서 평생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각각 심어놓은 씨앗과 발전을 이루어 틔운 싹 사이에는 분명하고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 되는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데도 굳이 두 위대한 사상가의 철학적 구별을 찾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한 비평을 참고하면 될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 사후에 태어났고, 따라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직접적으로 잘 알지는 못했지만, 플라톤과는 직접 교류했고 또한 굉장히 가까웠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플라톤의 저서나 문서를 읽고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과는 다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직접 교류를 한 만큼 더 많은 것을 그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짐작된다. 만약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다면, 현재의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 하나의 길잡이나 방침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평가를 함께 생각해 보면 소크라테스가 철학사가 있어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고, 그것은 다음과 같다. 윤리적 문제에 소크라테스는 천착했고, 보편적인 것을 그것에서 찾았다. 또한 최초로 정의라는 것을 주요한 것으로 삼았으며 자연계에 대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항상 소크라테스는 정의나 경건한 고유한 성질을 정의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가르쳐 이끌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에 대해 플라톤은 종종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분했던 사람으로 표현했다. 나는(소크라테스) 당신에게 사람이 행동할 수 있는 경건한 행동들을 이야기하도록 한 것이 아니다. 경건한 행동들 모두 경건하게끔 하는 경건이라는 것, 그것 본래의 바탕에 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할 것이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표현을 보면 항상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에 대해 겸손하고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오랜 시간에 걸친 참되고 착실하며 또한 변함없이 지성적인 찾음을 통해 알려질 수 있다고 하는 자신의 견고한 신념을 보편적인 것은 넌지시 알려 주거나 깨우쳐 주었다.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과의 공통점은 바로 인간에 관련된 문제들을 분석하는 것을 자신들에게 부과된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기존에 철학의 중심이었던 우주론적인 것에 대한 깊은 생각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서로 달랐다. 소크라테스는 여러 문제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의심을 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참된 지식과 까닭 없이 제멋대로 추측하는 것의 차이를 이해하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사실에 대한 문제, 경험에 의해서 명백하게 증명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의 문제들에 관해서도 자신의 견해나 시각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도덕설에 대해서도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소크라테스는 정말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길잡이나 방침으로 감정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또한 인간이 무엇을 가지거나 하고자 간절히 바라는, 즉 욕망도 믿으려 하지 않았는데 객관적으로 사리에 맞아 적당한 기준에 의해 옮음이 증명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러한 자세를 취했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사람이 택할 수 있는 특별한 어떤 이루고자 하는 일의 범위나 기준을 벗어나 그 이루고자 하는 일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근거를 두는 보편적으로 기본이 되는 표준에 하소연하고 있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보편적인 것은 깨닫기 까다롭고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편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우리는 긴 시간의 토론으로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항상 서로 다른 여러 가지의 올바른 행동과 엄숙한 행동을 예를 들어 보임으로써 경건과 정의의 고유한 성질을 명백히 밝혀 규정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가르치어 이끌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보편적인 것은 그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할 수는 있지만 감각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다. 평균적인 것을 뛰어넘은 사물들, 행동들은 살펴볼 수는 있어도 정의할 수 없는 것과는 반대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감각을 대수롭지 않게 깔보거나 업신여겼으며 이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도덕적으로 분별하고 판단하여 아는 일의 수단으로서 말이다. 보편성은 드러나 있는 모든 것들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을 끌어냄으로써 발견되는, 즉 보편성은 귀납적인 일반화에 의해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에는 곤란한 점이 하나 있는데 보편성이 드러나 있는 경우, 어떤 것들이 그러한가를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런 경우들을 택하고 사실을 적는 데 있어 기본이 되는 표준으로 여겨야 하는 그 보편적인 것을 앞서 알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도덕적 성찰을 사람들이 하도록 용기가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주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라고 여겼다. 그는 마지막 결론을 보여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아가야 하는 방향과 방법을 보여주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