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는 일반적으로 일컬어지기를 계몽주의 시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18세기 철학자들 사이에서 사상의 통일은 없었다. 어떤 철학자는 이성을 또 다른 철학자는 사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감각들과 의식 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을 판에 박은 듯 규칙적인 연속의 상태로 되돌렸다. 계몽주의란 말을 칸트는 이렇게 정의했다. 사람이 타인의 견해에 자기 뜻을 굽혀 복종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독립적 이성을 실현하게 할 마음을 갖추는 것이라고 말이다. 프랑스 계몽주의에 나타난 견해 중 다섯 가지 흐름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많은 부분은 17세기에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간 사상들과 밀접하게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첫 번째는 이성에 대한 호소를 들 수 있다. 이런 이성을 중시하는 경향은 일부분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이성에 대한 이러한 호소는 원래는 권위 층에 지지 않으려고 맞서서 버티거나 항거하여 사색적인 사람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기술이나 솜씨였다.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두 번째는 감각주의의 일정한 방향성이 넓게 퍼져 있었다. 어떤 사람이든 쾌락과 고통에 대해서 자극을 받아들이는 성질과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쾌락은 좋아하지만, 고통은 피한다. 도덕률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경험한 것이 사람들로부터 쾌락 추구에서 강력하게 믿도록 한 것들이다. 세 번째는 프랑스 계몽주의는 유물론적인, 심하다 못하여 나중에는 무신론적인 세계관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네 번째는 사회주의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 대혁명 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존속했다. 또한 프랑스 왕조의 혁명에 대한 바람이기도 했다. 프랑스 계몽주의 시기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낙관주의의 시기라고 말이다. 장래에 대해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샘솟는, 기존의 존재했던 사회적 규약의 체계는 꼬집어 나쁘게 말하는. 다섯번째는 루소이다. 그의 낭만주의는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중요하게 여겨 특별히 기록할 만큼 철학적으로 여러 가지 기여를 했다. 이성은 더 나은 세계를 이루어 내는 데 있어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루소는 생각했다. 이성은 하나로 정해져 있고 매우 고정적이다. 따라서 현재 실제로 해 나가는 것은 무엇이든지 굳게 지키는 데만 온통 신경을 쓴다. 루소는 오로지 세상에 태어난 이후 가지고 있는 마음의 움직임에 의지함으로써 사람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과 악이 정해져 있지 않고 환경에 의해 몇몇 선한 사람과 많은 수의 악한 사람을 만들어낸다. 루소는 그가 생각하는 악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그의 논문에서는 전혀 시도하지 않았고, 사회계약론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개선할 수 있는 방책을 적어 놓았다. 그의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유로운 몸으로 사람은 태어난다. 그러나 어디에서나 사람은 사슬에 매여있다. 루소는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이것이라고 보았다. 정부를 어떻게 제한하거나 제약하느냐 하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국민의 이익을 위함에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사람이 도덕적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짓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며 이 뛰어나고 훌륭한 목적을 이룸은 국민의 주권을 인정하는가? 또는 인정하지 않는가? 에 기인한다. 우리는 사회 속으로 들어갈 때 상식적으로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권위의 지배 아래가 아니라 스스로 일반의지의 지배 이래로 들어간다. 오로지 순간적인 자극에 복종하면서 사회를 떠난 사람들은 행동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회 속에 있는 사람들은 법이 주는 자유 아래에 들어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루소가 생각할 때 사회 속에서 그리고 그 사회가 공평하고 올바른 사회일 때 사람은 다양한 관심과 인성의 발전, 진실한 자아의 실현, 더 나아가 조금은 더 큰 전체에 합하여 하나가 되는 한 구성원이라는 인식의 작용을 얻게 된다. 일반의지란 무엇인가? 일반의지라는 개념은 루소에게조차도 항상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투표에서 드러난 많은 사람의 의지 같은 경우도 있으나 일반의지가 이것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의 선택이 일반의지로 보이는 경우는 언제일까? 투표자들에 의해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공통 이익이 인정되는 순간이다. 일반의지는 변하지 않고 순수하다. 그러나 감정에 치우치기 쉬운 많은 사람의 선택과 일반의지는 어떤 한 사람의 도덕적 행동과 순간적 욕망과 충돌하는 관계와 같다. 그런데도 루소는 투표에 의해 선택되는 정부가 더 좋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정부를 갖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만약 정부가 일반의지에 반하는 일을 한다면 그러한 정부는 주권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사실상 국민의 손안에 정부가 있고 공동선에 대해 국민이 관심을 갖기 전까지는 그것은 결코 주권을 갖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홉스와 달리 루소는 주권과 강압적으로 얽매거나 제한된 권력을 구분해서 생각했다. 루소는 종교에 있어서 신을 세계를 만들어낸 자로 인정하나 세상일에 대해 신이 개입하거나 계시 또는 기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인격을 가진 존재로서 신은 부정했다. 또한 루소는 하나님의 힘은 제한적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자연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하나님에게 결과의 부담을 갖게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종교관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루소가 이성보다는 감정을 더 믿었다는 데 있다. 루소는 이렇듯 이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한 감정과 헛된 감정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암시조차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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