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19세기 독일 철학

by funfearless 2024. 7. 8.

쇼펜하우어는 지성보다 의지가 본바탕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몇몇 경우에 어떠한 의지는 지적인 의지일 수도 있으나 지성은 절대 그렇지 않다. 때때로 우리 주변의 자연 세계에서 의지는 조건이나 상황과는 무관한 싸움이다. 의지라는 것은 그것이 좇아 구하고 있는 목적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목적을 염두에 두거나 생각하고 있는 의지들도 그 이루려고 하는 일이나 방향의 일정한 수준에 이르려고 사용하는 방법을 잘 다루지 못하고 충동이 데리고 가는 대로 이쪽저쪽으로 헤매고 있다. 더 나아가 의지가 지성의 지원을 받는 사람이 있어서도 그 의지라는 것은 더 고상한 의지는 전혀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그 까닭을 이렇게 생각했다. 도덕적 행위라는 것을 지성이 책임지고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지에 이롭고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지성은 어리석으며 너절한 방법을 생각해 낼 수도 있다. 남달리 재치가 있고 묘한 못된 꾀를 남을 속이고 좋지 못한 것을 좋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데는 체면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면도 있어야 하지만 지능도 또한 있어야 한다. 세계는 견해나 생각이며 그와 동시에 의지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의지가 세계의 일부이고 견해나 생각이라고, 즉 관념 또한 세계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쇼펜하우어는 세계 전체가 오히려 의지나 관념 두 개 중 하나로 판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비집고 들어가 발을 붙이는 철학자에게는 의지이고, 사물들이 드러나는 바깥 모양새를 가지고 이치나 진리를 밝히는 과학자들에게는 관념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격 또는 정신을 가지고 인간이 있어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해석한 점에서 관념론자였고, 특히 주의 주의적 관념론자라 불릴 만했다. 왜냐하면 만물에 있어서 (당연히 인간을 포함한) 의지를 최고로 봤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염세적인 견해를 자신의 주의 주의적 관념들에 더하여 채웠다. 물론 그의 관념론이 염세적인 견해를 논리적으로 속으로 지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의 주의적 관념론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염세주의적 관점이나 견해는 그 체계를 진전시켜 펼치기 위한 여러 방식이나 수단 중 하나이다. 쇼펜하우어는 불행한 일생을 보냈는데 이런 염세적인 관점은 그가 자신의 철학을 진전시켜 나가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편으로 여겨진다. 쇼펜하우어는 그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세계 문학을 빈틈이 없이 모조리 뒤져 고통이라는 것이 쾌락을 꼼짝 못 하게 하고 있다는 예시를 찾아냈다. 인간의 경험에 있어서 말이다.

진실로 선한 것과 진실로 악한 것 또는 질이 낮고 변변치 못한 것 사이의 구분을 짓는 것을 뛰어난 사람은 넘어서 있다고 니체는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니체는 그의 책 중 하나의 제목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뛰어난 인간은 선과 악을 초월해 있는 존재라고. 그의 이 말은 악이란 정상을 벗어난 불건전하고 지나친 양심이 사람들 그 자신 스스로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느 것이든 악이다. 니체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과 같은 격언을 따르는 것을 매우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부드러움과 온화함을 찬양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며 또한 자신이 스스로 약함을 알았기 때문으로 타인에게 이러한 말들을 떠넘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이 격언들을 좇아서 행한다면 약한 그들은 보살핌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악한 일들은 무서워하며 몹시 꺼리고 그 이유는 행동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힘을 가지고 말이다. 뛰어난 사람은 당연히 약한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몹시 꺼리는 것을 생각하는 그 입장을 넘어서 있으며 어떤 것이든 악한 것을 피할 수 있다. 우월과 열등 사이의 다른 점을 찾아내는 것에 그 근본을 두고 있는 것과 같아 선, 악 사이를 구분 짓는 것은 진실하고 올바른 구별이다. 이에 반해 약자의 구분 짓기는 착한가 간사하고 악한가를 구별하는 것으로 거짓된 구분 짓기이며 매우 좋지 못한 약함, 구실을 대며 그 까닭을 말하는 것 아니면 보살핌을 위해 생각해 낸 것이다. 니체는 간절하게 뛰어남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정말로 뛰어남과 뛰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는 않은 것 사이의 차이를 구분 지을 수 있는 기준은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몇몇 지점들 때문에 니체는 평론가들의 비난을 받았으나 이러한 비난이 꼭 공평하고 올바른 것이었는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있다. 후대 평론가들의 의문에 어떠한 철학자도 전부 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뛰어남의 수준에 대한 정도의 차이에 대한 기준을 니체가 일정한 원리에 따라 낱낱의 부분이 짜임새 있게 조직해 통일된 전체를 이루게 하지는 못했지만 뛰어남에 대해 예언자로서 소리높여 말한 것이다. 니체는 이렇듯 오히려 예언자였다. 그는 인식론, 형이상학에 흥미가 거의 없었고 칸트를 도덕을 이성을 잃고 믿는 사람으로 치부했다. 니체에게 세계는 처음부터 전하여 내려온 질서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목적 등을 없다고 여겼고 선, 악, 미, 추, 기계, 유기체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맞추어 쓰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사물들이 세계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쇼펜하우어에게 니체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다양한 예술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모양이나 형태를 만 드러냄으로써 세상의 단조로움과 어지럽고 질서가 없는 것을 마주하는 일을 겪지 않게 된다는 것. 그리고 니체는 쇼펜하우어처럼 자연을 전부 의지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의지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와 분명히 다른 점을 드러내기도 했는데 니체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거나 반대하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업신여겼다. 물론 니체는 살려는 의지로 인해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니체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았으며 살려는 의지가 권력에의 의지가 되는 그러한 생활을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