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야나의 근본원리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 사람들한테 배운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같은 것으로 다음과 같았다. 좋은 생활이라는 것은 이성과 고르게 잘 어우러져 자연적 충동이 진전해 나갈 때 그것의 결과로 사람을 위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타야나는 충동과 관념화라는 두 가지가 사람이 본래 가지고 태어난 성질에 있다고 보았다. 이 두 가지는 각각 다른 특성을 지닌 것으로 또한 그대로 작용하도록 두면 도덕적으로 뜻하지 않게 불행한 변고를 가지고 온다고 생각했다. 충동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 보자. 의도와 결과에 대해 충동이 제대로 분별하거나 해석하지 못하고 급하게 움직이면 짐승과도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관념화는 어떨까? 사회적인 세계의 움직이고 있는 힘과 물리적 세계를 서로 이어서 맺지 못하면, 몹시 거칠고 사나우며 정상인 상태에서 벗어난 공상을 계속해서 하게 된다. 하지만 충동과 관념화 두 가지 요소가 효과적으로 일상에서 관계를 맺어 합치면 이치나 논리에 합당한 행복을 위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많은 발전을 할 수 있게 해준다. 관념들이 충동을 지도하여 이끌게 되면 조직된 생활 안에서 충동은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행동의 몹시 급한 다양한 요구에 관념화가 맞닥뜨리게 되면, 정말로 있는 그대로 세상일에 비로소 관련이 있는 것이 된다. 그리하여 충동이라는 것은 기술이 되고, 관념화라는 것은 지혜가 되는 것이다. 산타야나는 진보에 대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진보라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자주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연속도 또한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성이라는 것은 본래 자연적인 세계에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바뀌고 더욱 보기 좋은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이 가진 더 나은 소질 중에 몇몇은 현실이 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변화 발전, 즉 진보는 인류의 역사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되풀이해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여러 세기를 지나오면서 인류는 한 걸음씩 가장 좋은 완성을 명확하게 정하여 두는 많은 사상에 의해 자연적 충동에 바뀌어 달라지는 방법을 급하지 않고 느리게 익혀왔다. 산타야나는 그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견해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상적이거나 또는 관념적인 모든 것은 자연적인 것에 그 기초를 두고 있으며, 자연적인 모든 것은 관념적 상태로 나아감을 갖고 있다.
1896년 발표된 제임스의 논문 중에 제일 이름난 논문인 믿으려는 의지에서 그는 자기 생각을 새롭게 구성하고 다시 태도를 명백하게 밝히는 데 도움이 되도록 힘썼다. 그가 자신의 논문에서 문제로 여긴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주 강하고 적극적인 본바탕이 어떻게 이런저런 점에서 우리가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데 가지는 다양한 신념을 정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제임스는 어떤 일을 이루려는 적극적인 마음의 힘이 신념을 다스린다는 것에 대해 확실히 그렇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런 다스림이 사람의 생각이나 견해에 대해 실제적인 심리학을 내놓은 것처럼 보았다. 제임스는 더 나아가 얼마나 어떤 사정이나 형편에서 이 다스림이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지 밝히고 싶어 했다. 그는 우리가 행동을 어떻게 할까를 정하기 전에 이 세상에 대한 모든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님을 꼭 집어 가리켰다. 우리는 때때로 가진 지식이 없어도 행동해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만약에 지식이 없을 때도 능률적인, 어떤 일을 활발히 해야만 한다. 우리가 반드시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 또 그것이 실제 생활에서 관련이 있는 중요한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선택에 따라 강력하게 행동해야 할 때, 믿으려는 의지를 우리는 실현하게 해도 괜찮은 것이다. 제임스는 조직적이고 계통적으로 결합 된 철학자는 아니었다. 또 주위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그는 용기나 큰 희망을 북돋워 일으키는 자신의 견해와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지도 않았다. 제임스는 여러 학설의 각각이 많은 빛을 세상에 던져 세상에 대해 얼마만큼 이해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있는 것들을 통틀어 합친 생각이나 입장이라거나 또는 최종적인 판단이라고 믿지 않았다. 제임스는 학설이 모순을 가지고 있어도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깊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세상을 이런저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했고, 또 자신의 세상에 대한 견해나 생각처럼 세상이 완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임스는 철저한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견해는 생각, 예측 불가능한 우연에 대해서도 동시에 견해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론적으로는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것들이 현실에서는 용감한 사람들의 빛나고 아름다움 승리로 바꿀 수 있다는 좋은 때나 경우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믿으려는 의지를 주되고 중요한 두 부분에 맞추거나 해당시켰다. 먼저 도덕 문제에 그다음에는 종교 문제에 적용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저런 힘에 대해서 또는 우리 주위 사람들의 거짓 없이 바르고 참됨에 대한 우리의 확실하고 견고한 신념은 이런 갖가지 힘과 바르고 참됨을 계산해 낼 수 있는 모자람 없는 원인일 수 있다고 제임스는 말했다. 그는 우리의 어떤 한계를 넘지 못하는 지식의 좁은 범위를 집어삼키는 끝없이 아득하게 넓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우리 자신을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강제로 요구받은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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