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은 경험론과 계통을 이루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형태의 유물론 두 가지를 모두 맹렬하고 매섭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 비판의 이유는 두 사상가가 완전히 달랐다. 베르그송은 반드시 그렇게 되게 되어있는 일들로부터 인간이 자유롭고 싶어 하는 욕망을 이치에 맞아 바르고 마땅한 것으로 내세워 증명하려 하였다. 또한 생명력이라는 것이 언제나 새로운 사람의 됨됨이와 더 나아가 우주가 더 좋은 상태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반면에 칸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과학적인 방법들이 타당한 것임을 증명해 내려고 했고 따라서 세계를 몸소 겪는 일에 있어서 어느 정도 정해져 있거나 한결같은, 틀림없는 방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베르그송은 창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한 번 있었다가 현재는 끝나고 만 일정한 연관을 가지고 하나로 이어지는 행위, 또는 하나의 행위라고 가정적으로 생각하며 단정하는 것과 같은 창조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또한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있는 어느 목적으로 지향하며 가는 것이라고 진화를 생각하는 것도 베르그송은 거부하여 물리쳤다. 그가 생각하는 진화라는 것은 끝없이 지속되거나 변함이 없는 하나의 창조적 과정이며 언제나 새로운 쪽으로 이동해 나가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저서 창조적 진화를 보면 생명이 진화해 온 유래, 또한 우주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유래는 생명력의 변함없고 많은 변화의 뒤에 변하지 않는 정체나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 그 내에서 나타나는 변화 중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것으로 미리 결정된 마지막 판이라는 것이 없다. 하찮아서 아무런 쓸데가 없는 반복이라는 것은 없으며 변화하는 모든 것, 그 아래에는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또한 이 예측 할 수 없음은 단지 사물들의 본질에 대해 우리가 구석구석 알지 못하는 데 있지는 않다. 창조적 에너지가 이미 과거에 만들어진 형태들을 뚫고 나와 낡은 형태들이 만들어 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를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생산해 낼 수 있게 되는데 그 예측 불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생물들이 갖고 있는 여러 형태는 창조적 에너지가 모두 잇달아 일어나는 현상으로부터 여러 방향으로 빠르고 세게 솟아나 간 결과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실존주의를 낮게 평가하는 것을 넘어 철학이 아니라고까지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동시대의 다른 철학적 흐름과 분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성적인 그리고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자기 멋대로의 의지적 행위라고 실존주의를 보는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어떻게 이성과 의지를 연관 짓느냐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먼저 키르케고르를 생각해 보자. 실존주의는 역사적으로 그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헤겔의 영향과 기독교적 가르침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사회적 질서나 풍습의 횡포에 반대했다. 사실 실존주의를 20세기에 확실하고 분명하게 만든 것은 몇몇 사람들이 실존주의의 원리들을 짜임새 있게 조직해서 통일된 전체를 이루어 낸 후 많은 발표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실존주의자들 가운데 이런 원리에서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이성에 의해 실존이 정해질 수 없으며 형식이라는 것이 개인의 의지로 실존에 주어지지 않거나 혹은 주어지기 전에는 실존이라는 것은 일정한 형식이나 모양이 없다는 것을 때때로 실존주의자들은 딱 잘라 말한다. 실존주의자들은 종종 타인에 대한 관계를 정하고 또는 그들 서로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결정하는데 흥미를 갖고 있었다. 또 다른 실존주의자는 단지 이성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를 갖게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한 사람의 앞으로 나아갈 길과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하는 데 있어서 말이다.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한다는 것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반이성은 아니다. 하지만 이성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본성의 한 측면일 뿐이다. 그리고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탐하는 것, 바라는 것, 이성과 감정,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는 충동과 갈망이 전부 동시에 또한 결코 떨어질 수 없게 결속되어 연관이 있는 행위이다. 따라서 인격 전체에 관련을 맺고 있다. 제한이 없는 꾸준함을 가지고 관계하는 사람에게 주는 승리의 마지막 의식이 바로 참된 이치의 기준이다. 감각 기관과 그 지각 작용으로부터 명백하게 증명해 내는 자연 과학자들의 내세움이나 이성의 많은 제정된 질서를 내세우는 논리학자들, 또는 살아있음을 증진하게 시키는 생물학적 쓸모는 진리의 표준일 수는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과 자기 세계의 뜻이나 가치를 정확하게 알게 되고 성립했다는 견고한 믿음을 갖고 살고 죽는 것이 바로 승리한 생활이다. 실존주의는 그 각각 다양한 지지자들에 의해 여러 방면에서 이용되어 온 하나의 견해나 입장이다. 유럽, 미국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에게 이용되었다. 또한 실존주의는 사라에 맞고 건실한 형태와 끝까지 진행되어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상태를 함께 진전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는 헤겔 철학의 전통에 있어서 다양한 추상 등에 반하는 또 다른 인식의 바탕이 경험에 있다고 보는 정신에서의 순순히 따르지 않고 거역하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진행되어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는 상태의 형태에 있어서는 그것은 몹시 사납고 세차게 주지주의에 반하고, 지식이나 지성보다 의지를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인 낭만주의다. 그것은 윤리학에 있어서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나 좁은 소견에 사로잡힌 고집이고 존재론에 있어서는 이랬다저랬다 잘 변하는 성질이나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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